Archive for 2016/10/18

죽여주는 여자 리뷰 – 인생의 나이테

모처에 올린 글을 긁어옴.
쓰다 만 느낌이 들었다면 제대로 읽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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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국가 중 남녀 임금격차 1위, 노인 빈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여성 노인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 미숙은 세월의 켜가 나이테처럼 몸 곳곳에 남아있는 60대 중반의 여성으로, 돈이 되는 일을 쫓았지만 여전히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은 일명 ‘박카스 할머니’가 되어있다. 그 바닥에서는 ‘죽여주는 여자’로 유명하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연출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는 우연히 만난 오갈곳 없는 코피노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 한마디 뱉지 않는 아이의 손을 잡고 데려온 그녀의 셋방 옆에는 의족 생활을 하는 청년 도훈이 살고, 위층에는 집주인이자 트랜스젠더인 티나가 살고있다.

덜컥 모르는 아이를 데려올 정도로 남의 딱한 사정을 쉬이 무시하지 못 하는 천성을 가진 미숙이지만, 생계를 위해 도훈이나 티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이다. 이런 그녀의 삶을 담은 프레임에서는 어딘가 수직적인 깊이감이 느껴진다. 가령,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카메라가 건물의 여러 층계를 한 쇼트에 담아내면서 낡고 오래된 집의 상태를 강조하기도 했다가, 역시 위에서 아래로, 높이 솟은 남산타워에서 전기선이 흉물스럽게 얽혀있는 골목길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그녀가 사는 동네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4:3 비율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것으로 나무의 나이테를 들춰보듯 그녀의 삶 깊숙이 스며 들어 보겠다는 일종의 의지로 보이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따로 있다. 영화는 미숙과 그녀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통해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혼혈인 등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관객에게 동정을 이끌어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을 대상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근래 영화계에 요구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인 다양성(Diversity) 문제를 이렇게 충실히 충족시키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소중해지는 이유이다.

다시 미숙의 이야기로 넘어와서, 인생 말년의 노인들에게 ‘죽여주는 일’을 해주는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생계 만이 문제는 아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 그녀의 턱 밑까지 쫓아온 일이다. 그녀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